우리 인간을 가만히 살펴보자면 인간에게는 도덕이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유명한 말을 아실 것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속에는 도덕적 의식이 있다.” 보통으로 말하면. 양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람이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인간의 속마음에는 어떤 사람을 물론 하고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무엇을 대할 때든지.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분별해 줍니다.
물론 어떤 때는 양심이 마비가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사망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한구석에서는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하게 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악한 길을 갈 때는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집니다.
이 양심이란 것이 언제든지 속에 있어서 잘할 때는 칭찬해 주고. 잘못할 때는 책망해 줍니다.
물론, 여기에도 인간의 이런 도덕성을 부인하려고 하는 사람은 양심을 여러 가지로 설명해 보려고 애씁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장하기를, “양심은 한 종족의 공통된 유전적 산물이다.” “양심은 교양의 산물이다.
”또는, “환경의 산물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후천적 원인으로써 설명하려고 애쓰면서 말합니다.
물론 양심 가운데 후천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후천적인 요소를 다 제하고도 그 속에 선천적인 요소가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도덕적 법칙이 어디서 왔는가? 성경은. “양심을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다음에 바르게살기 위하여 도덕적인 법칙. 곧 하나님의 율법을 그 속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에는 자연법칙을 두신 것입니다. 물론 모든 물질은 이 자연법칙을 준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 생활에서는 이 도덕적 법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과 자연법칙과의 관계와 우리 사람과 도덕적 법칙, 즉 양심과의 관계는 다릅니다.
자연법칙과 물질과의 관계는 그저 그대로 되는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람은 인격적 존재로 지음을 받아 자유가 부여되었으므로 그 관계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바로 쓰기 위하여 양심이 또한 부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양심의 방향을 따라 자유를 옳게 사용할 때에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양심은 누구에게나 새겨져 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고, 저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면 자연히 그 속에는 물이 있다고 결론하는 것이 아마 정당한 이론일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살펴볼지라도 양심이 있고, 저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살펴볼지라도 거기에도 반드시 양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배후에는 큰 양심이, 우주의 배후에는 대 양심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이 음성을 들을 때,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말했지만, 오늘날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이 양심을 전연 무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양심이 화인 맞은 것처럼 되어서 마비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요히 잠자리에 누워 잠들기 전이나.. "혹은" 아침 일찍이 깨어서 고요히 자기를 살펴볼 때는. 누구나 이 양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음성은 곧 하나님의 음성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스스로 살펴볼 때, 다시 말하면 인간의 종교성. 인간의 도덕성을 살펴볼 때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될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유명한 말을 아실 것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속에는 도덕적 의식이 있다.” 보통으로 말하면. 양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람이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인간의 속마음에는 어떤 사람을 물론 하고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무엇을 대할 때든지.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분별해 줍니다.
물론 어떤 때는 양심이 마비가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사망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한구석에서는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하게 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악한 길을 갈 때는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집니다.
이 양심이란 것이 언제든지 속에 있어서 잘할 때는 칭찬해 주고. 잘못할 때는 책망해 줍니다.
물론, 여기에도 인간의 이런 도덕성을 부인하려고 하는 사람은 양심을 여러 가지로 설명해 보려고 애씁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장하기를, “양심은 한 종족의 공통된 유전적 산물이다.” “양심은 교양의 산물이다.
”또는, “환경의 산물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후천적 원인으로써 설명하려고 애쓰면서 말합니다.
물론 양심 가운데 후천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후천적인 요소를 다 제하고도 그 속에 선천적인 요소가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도덕적 법칙이 어디서 왔는가? 성경은. “양심을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다음에 바르게살기 위하여 도덕적인 법칙. 곧 하나님의 율법을 그 속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에는 자연법칙을 두신 것입니다. 물론 모든 물질은 이 자연법칙을 준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 생활에서는 이 도덕적 법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과 자연법칙과의 관계와 우리 사람과 도덕적 법칙, 즉 양심과의 관계는 다릅니다.
자연법칙과 물질과의 관계는 그저 그대로 되는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람은 인격적 존재로 지음을 받아 자유가 부여되었으므로 그 관계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바로 쓰기 위하여 양심이 또한 부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양심의 방향을 따라 자유를 옳게 사용할 때에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양심은 누구에게나 새겨져 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고, 저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면 자연히 그 속에는 물이 있다고 결론하는 것이 아마 정당한 이론일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살펴볼지라도 양심이 있고, 저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살펴볼지라도 거기에도 반드시 양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배후에는 큰 양심이, 우주의 배후에는 대 양심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이 음성을 들을 때,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말했지만, 오늘날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이 양심을 전연 무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양심이 화인 맞은 것처럼 되어서 마비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요히 잠자리에 누워 잠들기 전이나.. "혹은" 아침 일찍이 깨어서 고요히 자기를 살펴볼 때는. 누구나 이 양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음성은 곧 하나님의 음성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스스로 살펴볼 때, 다시 말하면 인간의 종교성. 인간의 도덕성을 살펴볼 때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될 것입니다,